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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간 월요일]

20200518()

박준 야고보 신부

 

 

독서: 사도 16,11-15 / 복음: 요한 15,2616,4

 함께 있단다.jpg

 

 

 

흉악한 범죄자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인간을 물건처럼 여기는 소위 사이코적인 범죄자들이 요즘 들어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렀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타까움조차 생길 여지가 없는 범죄자들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범죄자가 아닌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 의인으로 자처하며 온갖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다는 사람들이 대의를 내세우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할 때에는 최소한의 연민도 생기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 사람들이 정말로 모르고, 정말로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악함이 창조주 하느님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덜 더럽히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40년 전 오늘의 학살을 초래한 책임자들 혹은 책임자 한 사람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겠지요. 직접 겪지 않았던 제 세대들도 이렇듯 분노를 느끼는데 그 고통의 현장에 계셨던 분들은 오죽할까요. 그저 사람이 먼저임을 알리고자 했던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 뿐만 아니라 영문도 모른 체 같은 동족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했던 일부 선한 군인들까지.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의 아픔은 이미 하얗게 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책임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부 정치인, 언론, 시민들로 인해 그 분노는 커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서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 또한 비슷한 아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이 체험했던 공포, 좌절 그리고 분노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것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따르던 스승의 실패라는 좌절뿐만 아니라 당장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가 점점 쌓여갔을 것입니다. 그 죽음을 선동했던 당시 종교 지도층을 향한 분노도 컸겠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의 고통과 분노는 치유되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체험한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힘이 불의와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증명하셨고, 제자들의 절망과 공포 그리고 분노는 어느새 치유되어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며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상대를 향한 분노의 표출을 통해 내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 질수도 있지만, 선물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택해야 할 방식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치유하는 일입니다.

 

5.18 항쟁 당시에 이미 그곳 시민들은 이 치유의 길을 먼저 택했다고 합니다. 상인들과 어머니들은 거리에 나와 솥에 밥을 짓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재료들을 활용하여 주먹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시민군들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광주의 어머니들은 얼마 전 다시 주먹밥을 만들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애쓰는 대구의 의료진들을 위해 주먹밥 도시락 ‘518’개를 만들어 전달한 것입니다.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비판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정치적인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투사들의 뜻을 이어야 하고, 그 유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 드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부활과 보호자 성령의 강림을 통해 5.18 민주항쟁의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하느님의 치유가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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